18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이로인해 인류는 급격히 늘어납니다.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 각자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한정된 지역으로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위생은 관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전염병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갔습니다.
소아마비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와 함께 했습니다.
고대의 벽화나 문헌을 보면 소아마비 환자로 추측되는 기록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상당한 수는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소아마비가 유행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죠.
1840년 독일의 의사였던 하이네(Jakob von Heine)는 특이한 질환을 보게됩니다.
아이들에게 열이나고 난 다음 사지가 마비되는 마비성 질환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환자들의 정보를 모아 정리하였고 [소아 척수마비(Infantile spinal paralysis)]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후 소아과 의사였던 메딘(Karl Oskar Medin)은 이 질환이 유행성 전염병이고, 발열이나 감기몸살부터 사지마비까지 다양한 증상이 나타남을 정리합니다. 메딘의 제자였던 윅먼(Ivar Wickman)은 마비증상이 없는 보균자들이 돌아다니면서 병을 퍼트린다는 사실도 알아냅니다.
장바이러스(Enterovirus)중 하나인 [폴리오바이러스(Polio virus)], 바로 [소아마비]를 유발하는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한겁니다.
소아마비의 무서운 점은 소아마비로 인한 사망보다 후유증으로 영구적인 사지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증상의 발생은 드물지만 쉬운 감염, 쉬운 전파, 그리고 증상 나타난다면 회복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후유증이 남는 전염병이 소아마비였습니다. 질환에 대한 정보는 모여갔고 전염병을 해결하기 위해 학자들은 병의 감염경로와 원인에 대해 연구합니다.
1896년 미국의 버몬트에서 최초로 소아마비가 유행합니다. 132명의 환자에서 18명이 사망합니다.
이후 1907년 뉴욕에서 2500여명의 환자가 발생하였고, 각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소아마비 환자들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1908년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와 포퍼(Erwin Popper)는 소아마비로 사망한 소아의 척수 추출물을 원숭이에게 주입하자 원숭이에게 소아마비 증상이 나타남을 발견합니다. 같은 해 록펠러 재단의 막강한 후원을 받던 미국의 플렉스너(Simon Flexnor)도 대규모의 영장류 실험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신경조직에 있던 바이러스로 인해 소아마비가 발생함을 알아챈겁니다.
당시 파스퇴르의 세균병인설이 확립되고 다양한 백신이 만들어져왔기에 소아마비 백신도 금방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플랙스너는 한가지 착각을 했는데 소아마비가 호흡기로 전염된다고 판단했던겁니다.
그는 소아마비의 대가였기에 그의 호흡기감염설은 모든 이들이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1930년대 후반 감염경로가 장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예방사업은 엉뚱한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1916년 소아마비는 대유행하며 사람들을 패닉으로 몰고갑니다. 미국에서 27000여명에게서 발병했고 이중 25%에 달하는 6000여명이 사망하며 수천명의 사지가 마비됩니다. 이중 뉴욕에서만 9000여명에게서 발병했고 2000여명이 사망합니다. 병원에가도 해결할 수 없었고, 병원에서도 소아마비 전염이 두려워 환자를 받지 않는 곳도 있었습니다. 병의 원인이 빈민자나 이민자에 의해 발생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어 그들을 탄압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소아마비는 빈민자보다 중산층계급에 더 많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고전적인 방식대로 도시를 탈출하거나, 마을을 폐쇄했지만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도시를 탈출하는 무증상 보균자들로 인해 소아마비가 더욱 잘 퍼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부모들은 아아들에게 열이 나면 그저 소아마비가 아니기를, 그저 무사히 열이 떨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1935년이 되어서야 학자들은 소아마비에 관한 두가지 백신을 개발해냅니다.
[브론디(Maurice Brondie)의 사백신]과 [콜머(John Kolmer)의 생백신]이었습니다.
[사백신]이란 화학적으로 불활성화시킨 바이러스를 투입하는 방식이었고,
[생백신]은 바이러스를 약독화 시켜 투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생백신은 파스퇴르 시절부터 백신을 만들어왔던 성공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상황이 워낙 절박했기에 백신이 개발되자마자 임상실험 없이 환자들에게 바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두가지 백신 모두 실패합니다. 오히려 백신으로 인해 전신마비가 일어나거나 사망하는 사건도 벌어집니다. 결국 소아마비는 이전에 정복했던 질환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연구했어야 했던 것이죠.
소아마비 백신 연구는 왜 이렇게 더디고 힘들었을까요?
첫번째는 소아마비 바이러스의 배양이 어려웠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소아마비 바이러스는 값비싼 영장류의 신경조직에서만 배양되었기에 연구를 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는 1948년 하버드 의과대학 [존 엔더스(John Franklin Enders)]의 연구팀이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신경조직이 아닌 일반조직에서도 배양되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방법을 알아내어 해결됩니다. 소아마비 바이러스의 배양과 공급이 원할해지자 소아마비에 대한 연구도 탄력이 붙습니다. 이후 엔더스는 이 공로로 1954년 공동연구자들과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존 엔더스(John Franklin Enders)]
두번째는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너무 많은 변종이 존재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변종 바이러스의 종류는 [195개]였습니다. 이는 195개의 변종 바이러스를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백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니면 분류별로 백신을 만들던지 했어야 했습니다. 연구자들은 195개의 바이러스를 어떻게든 분류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소아마비는 1940년대부터 매년 전세계적으로 50만명에 달하는 환자의 사지를 마비시키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1949년, 존스홉킨스 대학과 예일대학에서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세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것에 성공합니다.
세가지 종류의 백신을 만들던지, 아니면 세가지 종류에 적용되는 하나의 백신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류작업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나스 소크 박사(Jonas Salk)]가 있었습니다.
[조나스 소크 박사(Jonas Salk)]
[ 다음 글 예고 ]
다음 글은 조나스 소크박사(Jonas Salk)의 소아마비 사백신이 만들어지고 배포되었던 과정과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며 생백신을 주장한 알버트 세이빈(Albert Sabin)박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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