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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료실 일상(日常)

어떤 노부부 이야기

by vitaminjun.md 2017. 4. 22.

한꺼번에 다양한 종류의 절망감과 슬픔에 사로잡혀 힘들었던 어떤 날의 이야기다.

병동에서 가끔 보았던 노부부가 있었다.
할머니는 폐암으로 입원한 상태였다.
암세포들은 폐에서 전신으로 퍼져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간병인 없이 할머니를 극진히 간병했다.
사실 간병인을 쓸 여유가 없었다.
가족은 없었고, 병원비도 근근히 내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대장암이었다.
그나마 할머니보다는 몸상태가 좋았기에 간병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은 주치의가 아닌 나에게도 전해졌다.

입원한 상태에서도 할머니의 몸 상태는 나빠져만 갔다.
통증은 강해지고 의식을 잃을 때도 있었다.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가 들어갈때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손만 잡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옆을 지켰다.
그렇게 입원기간은 늘어갔다.

병동 간호사들은 새벽부터 환자들의 혈압, 맥박등의 활력징후를 정기적으로 체크한다.
그 날도 그 병실을 담당하던 간호사는 할머니의 활력징후를 확인했다.
혈압과 맥박은 전혀 측정되지 않았다.

'블루코드. 블루코드. O병동. O병동'
'블루코드. 블루코드. O병동. O병동'
스피커에서 어둑한 병원을 깨우는 날카로운 소리가 터저나왔다.
O병동에 환자가 있는 주치의들과 담당 의료진들은 병동으로 달려갔다.

의료진들이 처치실로 이동된 할머니를 확인했지만 심폐소생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DNR(Do Not Resuscitate, 소생거부) 동의를 받은 환자이기도 했지만,
사망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던 것이다.
어수선한 병동에선 항상 할머니 곁을 지키던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부재를 알아챈 의료진은 상황을 알리기 위해 할아버지를 찾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간대에 할아버지는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됐다.
간호사 P는 아침교대를 위해 병원으로 오고 있었다.
그녀는 병원내부에 꾸며 놓은 정원을 지날 때 사람의 형상을 발견했다.
할아버지였다.
그는 나무에 목을 맨 상태였다.

경찰이 조사를 시작했고 결론은 금방 나왔다.
할아버지는 자살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의해 죽었다.
질식사였다.
병원내부와 주변을 촬영하던 CCTV에서 할아버지의 행적을 볼 수 있었다.
한밤중에 병실에서 나온 할아버지는 병원화단으로 내려갔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나무에 목을 매었다.
유서도 발견되었는데 '고생하는 아내를 더이상 볼 수가 없었다','병원비를 내지 못해서 죄송하다'라는 글이 짧게 있었다고 했다.


주치의는 아니었지만 의사로서, 한명의 사람으로서,
한꺼번에 다양한 종류의 절망감과 슬픔에 사로잡혀 힘들었던 어떤 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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